프롤로그 -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일이 됐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되면 자신을 망가뜨릴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늘 정신을 차려야 했고 빗방울까지 두려워해야 했다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까.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
세상은 ‘자식 잃은 엄마’를 “슬픔의 상징”으로 생각하나, 정작 그녀는 충격과 분노, 무력감과 굴욕감 등에 시달리며 내내 울었을 뿐, 그런 감정과는 다른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구나. 그렇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중략)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힌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다.
연인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무정한 신과 사랑의 발명
나의 진실은 다음 문장에 있다. “Amo: Volo ut sis.”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에 적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훗날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9장 2절)에서 다시 적은 그 말.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모 볼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김시습은 세상이 자신에게 속고 있다며 거의 자기혐오에 가까운 문장들을 적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와 더불어 비참해졌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전율했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굴창이리라.” 무엇이 김시습에게 이런 문장을 쓰게 했을까.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외로움이 환해지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찾으러 장롱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비유될 만한 그 외로움을 그는 어떤 계기로 문득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그때를 ‘외로움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때의 외로움은 더이상 외로움이라고 불리는 그 감정이 아닌데, 그것은 철학자들이 고독이라 부르는 것과도 또 달라서, 그는 새로운 말까지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홀로움’이다. 이 말 앞에서 나는 애가 탄다. 이것은 어떤 상태일까?
운명이여, 안녕
‘사건’은 진실을 산출하고 우리를 그것과 대면하게 해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인데, 죽음 없이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죽음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약한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실(내 인생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죽음이 그 진실에 응답할 기회까지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더는 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 일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은 언제나 ‘아직은 아닌’ 일처럼 생각하며 산다. 본래성이 아닌 일상성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거짓된 망각의 세계 속에서 말이다.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내 죽음과 대면해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으니 바로 그런 가능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라는 것. 그런데 그것은 무엇일까.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본다는 것은?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그런 애국심 말고 다른 것
그리스의 옛 서정시에서 시대를 초월한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가짜 부모들의 명령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거기에 있어서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등의 서사시의 시대가 서정시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집단’과 ‘전쟁’과 ‘애국’과 ‘명예’ 등등의 가치에 균열을 가져온 것은 서정시인들의 ‘나’의 목숨과 사랑에 대한 단호한 애착이다.
개인들의 목소리를 옹호하는 일은 공동체의 운명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개인이 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다만 권세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애국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는 말이어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윤동주는 ‘최후의 나’를 향해 갔다
당신은 윤동주를 아는가? ‘조금 아는’ 사람만이 ‘안다’고 단언할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인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윤동주의 시를 배웠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윤리 감각과 자기 성찰적 태도와 부끄러움의 정서와 저항시적 성격을 외워야 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 스스로 윤동주를 발견하고 대화하고 감동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기회를 박탈당했다. 조금 알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고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이제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어준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지하철 출입구 밖으로 끌려나온다. 지옥 안으로 들어온 것이니 지옥의 문이 뒤에서 닫힌다.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파란 유황불의 화환”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렸다고 적었다. 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 그가 등단 이후 쏟아낸 놀라운 시들은 바로 그 잿더미에서 솟아오른 것들이므로.
아름다운 석양의 대통령을 위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보낸 지난 4년은 위의 시가 노래하고 있는 세계와 정확히 반대였다. 이 시의 메시지는 쉽다면 쉬운 것이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쉬운 말을 실천/성취해내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체험해야 한다는 것도 이 나라 시민의 불행일 것이다. 불행은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로 가야 한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임의의 다른 절망
내 안에 스승을 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이성복 시인에게 배웠다. “어른이 없으면 자기가 어른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른이 없는 것, 그것이 어린애지요.” 폐가 될까 두려워 그의 제자를 자처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스승의 자리가 흐릿해질 때마다 나는 그의 문장을 떨며 읽는다. “글쓰기는 ‘나’를 파괴하는 거예요. 칼끝을 자기에게 닿게 하세요. (…) 피 안 흘리면서, 흘리는 것처럼 사기 치는 걸 독자는 제일 싫어해요.” 그의 최근 책 여섯 권은 괴롭다. 어디를 펼쳐도 ‘너는 가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경經이라고 할까. 읽으면 비참해지지만 안 읽으면 비천해진다.
실은 같은 의문을 시인도 그의 스승 카프카에게 품었었다. 카프카의 문학은 비관적인데 어째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가 하고. 시인의 답은 이렇다.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를 잡기 위한 ‘맞불‘“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고,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